숭은사 배향 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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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慕軒公 (모헌공)
世代 |
휘 (諱) |
號 (호) |
生 |
卒 |
관 직 |
13세 |
이심(以諶) 신화(愼和) - 字 |
모헌(慕軒) |
1590년 |
1656년 |
∙문인(門人) |
지리산 자락 덕천강이 꺾어도는 곤명(昆明) 금성리. 예로부터 길지로 이름난 곳이다. 마을 가운데 모헌재(慕軒齋)가 자리하고 있다. 일찍이 남명19) 선생에게서 직접 학문을 배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한 평생 굳은 지조를 지켜온 모헌(慕軒) 정이심(鄭以諶)의 학덕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다.
公은 1590년(선조 23년) 오봉(鰲峰) 정대수(鄭大壽)의 5남 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진주 서쪽 마동(馬洞)에서 태어났다. 모헌의 부친인 오봉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곤양군수 이광악20) (李光岳)을 도와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물리치는데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랐고 친구들과 놀 때에도 항상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자라서는 남명 선생 사후에 태어나 남명 선생에게 나가지 못한 것을 항상 안타깝게 여겨 당시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던 동계 정온, 미수 허목, 겸재 하홍도, 무민당 박인 등과 긴밀하게 교유하는 한편, 매월 초하루 덕천서원에서 모여 강회(講會)를 함께 했다. 일찍이 한말 영남지역 대학자 회봉 하겸진은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하거든 그 벗을 보라고 하였으니, 공에게는 세 분의 친구가 있다. 동계 정공과 미수 허공과 겸재 하공 이 세 분이 공의 친구이니 공께서 더불어 친구를 사귄 것을 보면 또한 공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며 “공께서 일찍이 퇴계와 남명 두 분 선생으로써 우리나라 학문의 정통으로 삼고 청량산에 들어가서 도산서원을 참배하고 덕천의 세심정에 올라서 늦게 태어난 감회를 드러내었으니 친구로 사귄 세 선생은 모두 두 분 선생을 사숙한 분들이다”라고 했다.
모헌이 퇴계와 남명의 학덕을 흠모하며 이들을 사숙한 제자들과 절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헌은 남명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각재 하항을 위해 대각서원21)을 건립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모헌은 효자로 이름이 드러났다. 부모상을 당했을 때 6년간 여묘살이를 한 것은 물론, 상을 마치고도 산 아래에 집을 짓고 독서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은 곤명면지(昆明面誌)에도 실려 있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오랑캐인 후금(후에 淸)과 굴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게 되자 모든 활동을 포기하고 두문불출하며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려했다. 단지 그는 동계 정온과 편지로 가슴속에 품고 있던 울분을 토로하며 군자의 나라인 조선이 소인의 나라인 청에 굴복해야 하는 모순된 현실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1644년(인조 22년) 청이 조선에 명의 숭정(崇禎)의 연호 대신 순치(順治)의 연호를 사용할 것을 강요하자, 그는 시를 지어 따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今年非復大明年 不幸身無死昔年 年老眼昏還一幸 忍將新曆見胡年 |
금년도 다시금 명나라의 해가 아니던가 옛날에 죽지 못한 이 몸이 불행하기만 하네 나이 들어 눈이 어두운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차마 어떻게 새로운 달력으로 오랑캐의 해를 보겠는가 |
이처럼 충절과 의리를 우선하는 모헌의 삶은 남명학파의 기질적 경향과 가문의 전통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고려 삼은(高麗三隱)’이라고 불리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는 ‘삼선생찬(三先生贊)22) 을 지어 자신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叔父(숙부)인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지은 묘갈명에 “일찍부터 늦게 태어나서 남명의 문하에서 수업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삼더니 겸재 하홍도 남계(南溪) 정승윤(鄭承尹)과 봉강 조겸, 무민당 박인, 임곡 임진부 등 여러 선비들과 도의로 사귀고…” 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묘갈명의 연호 역시 모헌의 뜻을 받들어 ‘숭정(崇禎)’이라고 표기해 놓았다. 모헌의 절개를 후손들이 그대로 받들어 계승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모헌은 평생 벼슬을 하기보다는 고향에서 지조를 지키며 후학을 양성하다.
1656년(효종 7년) 67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 그의 위패는 사림의 공론에 의해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안치되었다. 안치 때 동계 정온의 충절을 기리는 모리재23) (某里齋)에서 “선생은 은렬공(殷烈公)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옥산 도산 덕산의 사당을 참배하였으며, 동계 미수 겸재와 종유하여 강마의 뜻을 다했으니 이는 사우의 연원이 큰 것이다”라는 뜻의 글을 보내왔다.
공은 남명의 학문을 사숙(私淑24))하고, 평생 절의를 지키신 분이다.
기록 및 유적
구 분 |
제 목 |
찬 (撰) |
소 재 지 |
비 고 |
記 |
慕軒公 以諶 行狀 |
계당 유주목 |
문헌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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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軒公 以諶 奉安文 |
목사 정현석 |
문헌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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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 |
慕軒公 以諶 墓碑銘 |
응와 이원조 현감 김사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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慕軒公 以諶 墓碣銘 |
星山 李源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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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書 |
모헌문집 |
慕軒 鄭以諶 |
청계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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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헌지 |
慕軒 鄭以諶 |
청계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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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심(以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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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조식(曺植, 1501년 ~ 1572년)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자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 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사단법인 남명학 연구원 (http://www.nammyung.org) 참조]
20) 1567(명종 12)~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아버지는 군수 호약(好約)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가 되었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들을 독려하여 방비에 힘썼다. 그해 10월 영남지방의 요지인 진주성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고립되자 거창에 있던 그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을 받고 좌익장이 되어 수병(手兵)을 이끌고 진주성에 들어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을 도와 싸웠다. 전투 도중 김시민이 부상을 당하자, 그를 대신하여 병사들을 지휘한 끝에 일본군을 물리치고 진주성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21) (大覺書院) 1610년 각재 하항(河沆, 1538~1590)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士谷里) 518에 있다.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18년에 복원하였다. 현재 무송 손천우, 영무성 하응도, 백암 김대명, 모촌 이정, 조계 유종지, 송정 하수일 등 일곱 분의 학행을 더불어 기리고자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를 올린다. 2004년 3월 18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44호로 지정되었다
22) 三先生贊 / 牧隱先生 天資甚厚爲世儒砥柱一筆扶綱祥鳳刷羽有功有業卓然先覺瞻望奔走整我冠服 / 圃隱先生 先生之學宗我紫陽金玉精粹黼黻輝煌開繼斯文芝蘭襟裾麗運告訖義辦熊魚死生有道泰山鴻毛垂之竹帛百世彌高 / 冶隱先生 資稟精敏聞道則早非仁奚取非義奚蹈聖朝禮聘終不屈節場駒未縶薇歌忽發手執天綱歸我罔僕烈烈彌光儒林矜式
22) 정온(鄭蘊)이 낙향한 후 죽을 때까지 은거했던 곳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이 건립한 재사(齋舍)이다. 1637년 인조가 중국 청 태종 앞에 나가 항복하는 치욕적인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파인 정온은 남한산성에서 자결을 시도했으나 전의(典醫)와 광주목사의 손에 구명된 후 낙향하여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은거했다.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673 에 있으며, 1995년 5월 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24) 직접(直接)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道)나 학문(學文)을 배우거나 따름